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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자 프란치스코 빨라우

전교가르멜수녀회의 설립자인 프란치스코 빨라우 신부는 1811년 스페인에서 태어나 신앙심 깊은 부모의 가정 교육아래 유년기를 보내고, 17세에 레리다의 신학교에 입학하여 4년 동안 철학과 신학을 공부하였다. 신학교 생활을 하면서 자신의 존재에 의미를 부여하게 될 구체적인 사랑을 찾기 위해 1832년에 바르셀로나의 맨발가르멜 수도회로 이적하여 수도생활을 시작한다. 그는 가르멜회 수도자로서 구약의 예언자 엘리야와 성녀 예수의 데레사의 열정 그리고 십자가의 성 요한의 관상적 침묵에 깊이 매료되었고 그 성인들의 영성을 자신의 것으로 심화시켰다.

1835년 스페인의 내란으로 바르셀로나의 가르멜의 성 요셉 수도원이 반란자들에 의해 불탔고 수도자들은 추방당하여 뿔뿔이 흩어졌으나 프란치스코 빨라우는 자신의 가르멜 성소를 계속해서 충실히 살아가는 가운데 1836년에 사제서품을 받고 설교 등의 사도직 활동을 시작하였다. 그 후 정치적 소용돌이 속에서 1840~1851년 까지 프랑스로 추방당하여 거기서 깊은 고독의 생활과 사도직을 하였고, 당시 교회 상황에 응답하기 위한 여러 권의 책을 저술하였다. 동시에 몬또반 교구에 있는 리브론의 성모경당 근처에서 젊은이 그룹을 지도하면서 그의 영적 가르침과 삶을 따르는 이들이 생기기 시작하였다.

1851년, 스페인 바르셀로나로 돌아온 빨라우 신부는 시민들의 깊은 내, 외적 쇄신이 필요함을 깨닫고 그들이 신앙과 덕의 생활을 하도록 성 아우구스티노 성당에 “덕행학교”라는 교리교육 시범학교를 설립하였다. 3년간 계속된 이 학교의 가르침은 그 도시의 문화, 종교, 정치, 사회적 환경에 큰 영향을 끼쳤다. 그러나 정부는 바르셀로나에서 발생한 거대한 노동파업의 책임을 이 학교에 전가시켜 학교를 강제 폐쇄시켰고, 학교 책임자인 빨라우 신부는 이비사로 유배되었다.

프란치스코 빨라우 신부는 1860년에 사면되어 자유롭게 육지로 돌아갈 수 있을 때까지 유배지에서 사람들의 올바른 신심을 위해 여러 본당들을 찾아다니며 꾸준히 설교 활동을 하였고, 동시에 깊은 고독 속에서 교회의 신비를 묵상하면서 당대 교회의 운명과 함께 하고, 교회를 위한 자신의 사명을 확실히 깨닫는다. 이 사명을 바탕으로 전교가르멜수녀회를 창립하여 그가 지도하는 자매들이 세상의 변화 앞에서 교회를 위해 헌신하게 하였다.

그 이후 빨라우 신부는 스페인 안에서 교회에 대한 열정으로 구마활동, 집필, 기자로서의 활동과 설교 등을 함과 동시에 그가 설립한 수녀회의 자매들을 지도하고 규칙서를 제정해 주었다. 그는 1872년, 자매들과 함께 당시 유행하던 페스트 환자를 돌보다가 타라고나에서 선종하였고, 1988년 4월 21일, 교황 요한바오로 2세에 의해 시복되었다.

*출처: 전교 가르멜 수녀원 홈페이지(www.carmis.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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